사형제도의 목적 – 정치적 목적 : 동양의 경우

동양에서 기록에 남은 고대의 형벌은 그 수법이 매우 잔혹하며 죄인을 죽이는 것 외에도

두려움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여러 민족의 충돌이 잦았기에 통일된 제국으로의 시기와 그렇지 아니한 시기 간에

사형의 차이가 있었다.

상왕조의 경우 기록에 남은 사형제도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심장을 도려내거나

임산부의 태아를 적출하는 것, 사람을 베어 잘게 다지는 것 등 잔혹한 형벌들 이었다.

상왕조가 공포로 군림한 것과는 다르게 후대의 주왕조는 상왕조의 사형제도를 비난하면서

사형제도의 잔혹함을 완화했다.

상왕조와 대비되는 완화된 사형제도는 주왕조가 주장하는 명분,

즉 상왕조의 부덕함과 그에 따른 주왕조 성립의 필연성을 설득하는 도구로 이용 되었다.

사형제도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인 것은 두 왕조모두 같지만 공포 외에도 다른 활용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로도 중국의 형벌은 사형제도에서 상대적인 차이가 존재하나 잔혹한 방식이라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삼국시기와 남북조 시기라는 오랜 전란의 시대를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사형제도를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통일된 정권의 탄생으로 과거에 비해 혼란이 줄어들어 사형제도 또한 그에 따른 것이다.

전란이 끝났으며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고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뜻하는 방법으로서의

사형제한이었다.

이는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행위라 볼 수있다.

당나라에서도 이러한 사형제한의 기조는 이어졌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 무리한 토목공사와 전쟁으로 통치체제가 흔들리자 사형제도가 다시 강화되어갔듯이

당나라 또한 고구려, 토번 등과의 전쟁으로 통치체제의 유지를 위해

사형제도가 점차 잔혹한 방식이 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에 비해서는 완화된 형태였다.

당나라 이후 오대 십국시대에 들어서 중국이 다시 혼란스러워지면서

사형제도는 더 잔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 사형으로는 후대에 능지처참으로 알려진 능지형이 있다.

이후에도 강력하게 중국을 지배하는 왕조가 등장하지 못하면서

능지형은 널리 사용되었고 후에 명나라의 대명률에도 포함되게 된다.

이후에 나타난 통일정권인 명, 청은 이전의 수, 당 과 같이 사형제도를 법으로 제한하려 하였으나

말년으로 갈수록 잔혹한 형벌이 다시 부활하고 남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고대시대때부터의 사형제도

우리의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법인 고조선의 8조법을 통해

그 시대에도 사형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있다.

고조선 시기에는 살인한 자에 대하여 처벌로서 사형을 집행했지만

후일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의 군이 설치되면서 통제의 목적으로 사형제도가 더 강화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우 정치적 목적으로 사형이 사용되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전쟁과 협력을 반복하던 삼국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전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의 패배는 영토의 상실과 그 지역에 거주하던 인구의 상실로 이어졌는데

토지보다 사람이 부족한 시대이었기 때문에 인구의 상실은 타격이 컸다.

삼국 모두에서 패전한 자와 탈영한 자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군대의 사기를 저해하는 탈영이나 패전을 강하게 처벌하는 것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인구의 상실이 국가 유지에 큰 피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 모두 외교적인 방법은 한계가 있고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권유지를 위해 군대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신라의 사형제도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삼국중 가장 국력이 약했기에 사형이 더욱 엄격하였는데

연좌제 까지 시행할 정도였다.

통치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고려는 그 정당성이 불교적 통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살생을 금기시 하는 국가였다.

살생을 하지 않아 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요리 몇가지만 있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있다.

고려는 건국과정에서 불교 선종세력의 지원을 받아 건국되었기에 불교적 윤리관을 지키지 못하면

건국의 정당성 또한 그 권위가 떨어지는 형태였다.

때문에 교려는 죄질이 중한 범죄가 아니면 사형을 제한하는 형태로 사형제도를 운용하였다.

불교적 통치 이념 외에도 고려가 가진 특수성으로는 귀족정치가 있다.

불교와 호족들의 연합으로 탄생한 국가 이기에 호족들이 귀족이 되어 권력을 형성하였다.

불교적 이념에 따라 사형을 제한하여도 그 죄질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사형을 집행했는데

죄인이 귀족이라면 사면을 통해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왕 또한 호족에서 출발한 정권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다툼이 있어도

귀족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는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조선의 사형제도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면서 탄생한 국가이기에 고려와는 다르게 사형의 집행이 더 잦았다.

조선초기에는 불교적 색체가 남아있었지만 법이 정비되면서 명나라의 사형제도를 도입해서 사용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였기에 왕 또한 유교적 행동이 요구되었고

유교사상이 제도에 도입됨에 따라 사형수에 대해서도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고려에 비해 사형의 집행과 그 잔혹함은 증가하였어도 유교적 논리에 따라 제한을 받는 형태였다.

건국초의 전성기 이후 왕권의 약화와 귀족권의 성장, 잦은 전란으로 인한 사회혼란 등으로

조선의 사형제도는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전의 사형이 죄인을 죽이는 것 외에도 유교적 이념이 제도에 적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작용하였다면 조선 후기에는 모반과 신분질서 유지의 도구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특히 숙종대에는 잦은 환국으로 인해 권력의 구도가 안정적이지 못하여 사형이 남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환국에 따라서 정치세력의 우위가 자주 바뀌기에 기회가 왔을 때 미리 상대를 제거하게 되었고

왕 또한 신하들의 다툼을 조장하였기에 사형은 자주 집행되었다.

정치 세력의 권력다툼 외에도 신분제 질서가 흔들리면서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권력다툼은 권력 내부의 일이지만 신분제의 동요는 권력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 이었기 때문에

그 대응은 달랐다.

패배한 양반은 사약으로 죽이거나 고문을 하여도 시신은 보존하였지만

민란의 경우에는 예외없이 잔혹한 고문과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의 집행 이후에도 죄인의 시신은 경고의 의미로서 사용되었기에 온전히 보존하기도 어려웠다.

조선말에 이르러 인권의식이 싹트면서 사형제도의 권위가 약해졌다.

왕조 또한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여 잔혹한 형벌을 폐지 하는 것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려 하였다.

정권의 유지를 위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면서 다시 잔혹한 형벌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사형은 독립의지를 꺾고 식민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108명의 의병에 대한 사형명령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였으며

사형집행이전에 이루어지는 고문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사형의 집행은 총살이나 독, 교수형이 사용되었다.

과거에 비해 수단의 잔혹함은 줄어들었지만 사형선고와 집행이 간단하게 이루어져서

이것으로 공포를 조장하였다.

대한민국의 사형제도

대한민국은 사형제도를 실시하는 국가였으나 1997년의 사형집행을 마지막으로

14년 이상 사형집행을 하지않아 실질적인 사형폐지 국가로 인식된다.

이는 사회적으로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의견이 대두함에 따른 것인데

건국 이후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사형을 남용하였던 것이

국민의 법 감정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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